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 (문단 편집) == 타임라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gFfUU4IPqs)]}}} || || 이 세계관을 대략적으로 설명한 영상[* 다만 아래의 내용을 모두 다루지는 않으며 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중점으로 설명한 영상이다. 썸네일의 [[빌헬름 2세|카이저]]가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는 것]] 하나로 현실과 갈라진다.] || 카이저라이히 제작진의 유튜브 채널인 [[Kaiser Cat Cinema]]에서 정기적으로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의 [[모큐멘터리]] 시리즈를 연재중이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Kaiser Cat Cinema)] 카이저라이히 세계관과 현실의 분기점은 '''1917년'''이다. 1917년 1월, [[빌헬름 2세]]는 주기적으로 행하는 제국 군사총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굶겨 죽이기 위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재개를 거부한다.[* 현실에서는 1917년에 재개했으나 영국이 중단 이전에 본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경악스러움을 깨닫고 이에 맞춰 장비를 개발한지라 이전에 비해 크게 효과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미국 상선이 침몰당하며 미국이 참전해 독일이 패망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주전파이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지지자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RMS 루시타니아]] 격침 사건 이후 미국이 협상국 편에서 참전한다면 지탱되던 전선이 붕괴하여 패배할 것이라는 공포에서 거부된 것이기도 했다.[* 미국의 참전을 결정한 요인 중에는 [[치머만 전보 사건]]도 있는데,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거부할 정도로 미국의 참전을 꺼렸다면 이 전보 사건 역시도 이 세계관의 독일이 보낸 적 없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애초에 이 전보 자체도 잠수함 작전 재개 때문에 발송된 거지만.]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결국 1차 대전 참전을 거부했다. 이미 한계까지 밀어붙일 대로 밀어붙인 프랑스군을 시작으로 [[협상국]] 내부에선 크고 작은 균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협상국이 부딪힌 문제 중 가장 큰 건 두가지였다. 하나는 프랑스군이 [[니벨 공세]]에서 처참한 피해를 기록한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1917년 12월, 영국 해군이 미국의 독일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담긴 수송선을 격침시킨 것이었다. 니벨 공세의 피해로 프랑스 내부의 시민 사회는 분열해 버렸으며 이와 함께 프랑스군이 분열 상태에 빠지고, 영국은 해상 봉쇄를 해제하는 사이 독일은 미국인들에게 [[순무의 겨울|이미 한계에 다다른 자신들의 식량 상황]]을 보여주면서 지원을 호소함과 동시에 동부 전선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발생한 피해를 빠르게 회복했다. 이후에는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천재적인 돌격 전술을 배웠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의 상황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고 결국 [[러시아 혁명|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벌어져 전선에서 이탈해버리고만다. 그 사이 독일은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거대한 동유럽의 땅을 획득하게 되었고, 특히 유럽의 가장 큰 곡창지대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의 획득이 결정적이었다. 육로를 통해 안정적으로 대규모의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무엇보다 러시아 제국의 동유럽 식민국가들에 빠르게 독일의 왕족과 귀족들을 배치해 카이저는 러시아를 완전히 배제시켰다. 이로 인해서 [[러시아 제국]]의 넓은 영토에서 지속적으로 병력들을 소모하는 대신 서유럽에 대한 파멸적인 위력의 총공세를 행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가 독일에 항복한 것은 덤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카포레토 전투]]에서의 치명적인 맹공을 통해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시켰다. 이후 [[백일 전투]]의 실패로 이미 프랑스는 공세를 위한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80만의 거대한 희생자들은 회복 불가능한 피해가 되었다. 그리고 독일은 빠르게 동부전선에 흩어진 병력들을 총집합하여 한계까지 도달한 협상국을 향해 마지막 총공세를 행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26일, 협상국 진영의 핵심 지휘부가 위치해있던 아미앵은 독일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이후 협상국 군대들은 독일군의 일방적인 포위섬멸전으로 무력화된다. 이후 5월 31일에는 파리에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한계까지 몰렸던 [[페르디낭 포슈]]는 결국 최고 지휘관 자리를 [[필리프 페탱]]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미 아미앵 함락과 파리 공방전이 시작된 상황 속, 영국군은 희망을 잃고 해안가를 향해 후퇴하기 시작했다. 1919년 5월, 그나마 한 줌 남은 병력과 병기들을 가지고 프랑스군은 독일군을 향해 반격을 행하기 시작하였고 전차 부대와 기병 부대를 통해 전선을 뚫기는 하였으나 무리한 공세로 인해 틈이 크게 벌어진 사이로 독일군이 공세하여 후방은 완전히 붕괴해버렸다. 이미 프랑스는 굶주린 시민들이 만든 생디칼리스트 민병대들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고 1919년 10월에 파리 공방전은 결국 독일의 승리로 끝나는 것으로 서유럽에서의 전투는 종결된다. 그 다음 달엔 프랑스는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다. 1919년 11월, 마침내 독일은 모든 유럽 국가들을 자신들의 손아귀 아래에 놓게 되었다. 1917년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생디칼리스트 민병대들은 1919년, 대전쟁에서 패배한 공화국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반란을 행하기 시작한다. 이미 이탈리아는 1919년에 생디칼리스트 반군들이 정권을 잡았고, 프랑스마저도 독일군의 방치와 공공연한 [[생디칼리슴]] 지원 속에서 생디칼리스트 반란군들은 이미 한 차례 무너진 프랑스군의 모든 것들을 흡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전쟁의 참전용사들이 참가한 생디칼리슴 반란은 베르사유 조약 후 무력화당한 공화국 정부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공화국은 서북부 지역 해안가에 고립되었고 [[페르디낭 포슈]]를 중심으로 기존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그런 한 편으로는 영국은 로열 네이비를 통한 제2차 [[유틀란트 해전]]에서 독일 해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으나 영불 해협을 넘어서 도달할 수 있는 병력들이 전무했다. 이미 인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식민지 파병 군대들은 식민지 내의 크고 작은 소요 사태들을 막는 것마저도 벅찬 상황이었고 결국 1921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독일에 평화 조약을 제안하여 '명예로운 평화'를 맺어 제1차 세계 대전은 [[동맹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게 영국마저도 전쟁을 포기한 와중 1923년, 4년 간의 잔혹한 내전의 끝에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알제리로 도망가면서 붕괴하였고 프랑스 코뮌 정부가 들어섰다. 타국에 비해 큰 피해 없이 대전쟁에서 빠져나온 영국 또한 곧이어 무너져내린다. 이미 대전쟁에서는 패전한 것이 확실시되었으며 마지막 치명타인 유틀란트 해전마저도 후속 병력들의 부재로 인해 무의미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자유당(영국)|자유당]]-[[보수당(영국)|보수당]]-[[노동당(영국)|노동당]]의 세 정권이 빠르게 지나갔으나 패배의 치욕과 서유럽 붕괴의 혼돈, 그리고 아일랜드의 독립 중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 했고 도리어 보수당의 호전적인 대아일랜드 정책과 상반된 군사 긴축 정책은 북아일랜드마저도 [[신 페인]]의 [[아일랜드 공화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당마저도 자유당과 보수당의 협조가 전무하였고 고의적으로 무시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당 출신 인사 대다수가 생디칼리스트들에게 동조하였고, 1921년 9월 웨일스 포트탤벗 지역을 시작으로 발생한 생디칼리스트 혼돈은 1925년 [[카디프]] 시의 노동 계층 파업과 소요로 이어졌다. 결국 영국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같이 생디칼리스트 반군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노동 계층들이 모여있던 웨일스를 시작으로 스코틀랜드가 생디칼리스트 반군들에게 넘어갔고 노동당 출신 인사들과 친생디 인사들을 긁어모아 브리튼 연방을 형성한다. 해군과 포병대는 분명 왕당파 세력들이 앞서있었으나 병력들의 규모와 육상에서의 공세 능력은 생디칼리스트 브리튼 연방군이 확실히 앞서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캐나다의 병사들은 잉글랜드 남서부 지역에 방어망을 형성하면서 빠르게 포위된 잔존 영국군들과 왕당파 인사들을 구출하여 캐나다로 도망갔다. 그리고 이듬해에 남아있는 영국 복고파들과 반생디 파벌 정치인들은 브리튼 연방 총의회 부의장 존 휘틀리(John Wheatley)의 특수작전집행부,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의 활동으로 숙청당하고 대영제국이 무너진 자리에서는 브리튼 연방이 세워진다. 이후 호주, 인도, 캐나다 등의 식민국들은 윈저 왕조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거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독일의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못 하고 분열되거나 사라졌다. 이렇게 서유럽에서는 생디 좌파 세력들이 연이어 승전보를 울렸으나, 러시아 혁명은 [[멘셰비키]]들과 백군의 연합이 승리했다. 소비에트 적군의 주축이었던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는 각각 저격과 포격에 의해 예정보다 더 빠르게 죽었고, 그 상황에서 백군 장군들 중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포격에서 살아남았다. 이로 인해 부하린, 스탈린 등의 내부 권력 투쟁 등으로 오합지졸이 된 소비에트 적군들은 빠르게 무너졌고 내전의 종전 이후 러시아 공화국 체제가 이룩되었다. 한편 러시아 혁명의 실패 이후 새로운 극좌 사상이 생겨났다. 혁명의 실패에는 지리멸렬하고 분열된 지도부가 큰 원인이었다는 분석 하에 국가에 반대하고 국가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이념적 순수를 추구하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혼합체인 '전체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이는 브리튼 연방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더 나아가 미국의 생디칼리스트 조직들 일부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편 백군의 경우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쿠데타를 벌이려고 하였지만 [[창백한 말#s-3|창백한 말]]의 작가이자 사회혁명당 출신 극우 [[보리스 사빈코프]]가 이를 중재하였다. [[게오르기 주코프]], [[미하일 투하쳅스키]], [[이오시프 스탈린|이오시프 주가시빌리]] 등의 여러 볼셰비키 출신 인사들은 아르한겔스크로 도망쳐 프랑스 코뮌과 브리튼 연방으로 도망을 쳤으며 이후 군사 교육 경험과 러시아 내전의 경험을 살려 군사계에 종사하거나 여러 국가들에서 발생한 혁명주의 세력들을 지원하였다. 한편 중국은 현실에서 소련과 중국 국민당이 그러했듯이 프랑스 코뮌의 지원을 받아 [[중국 국민당]]은 [[국민혁명]]을 행했다. 그러나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은 [[우페이푸]] 원수의 [[직예군벌]] 세력과 청나라 복고파 세력에 의해 실패했고, 결국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가 분열되고 우파는 구심점이 될 인물을 모두 상실하여 궤멸한다. 이후 분열된 국민당 우파에서 떨어져나온 [[장쭤린]]의 [[봉천군벌]]이 행한 [[2차 직봉전쟁]]의 봉천군을 다시 격퇴시켰다. 그러나 독일은 국민당과 봉천 군벌을 완벽히 파쇄시키지 못 한 것을 빌미로 청나라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을 행한다. 독일의 내정간섭은 [[선통제]]를 다시 자금성의 주인으로 올려놓는 것에까지 이르렀고, 모욕받은 원수 우페이푸는 더 이상의 독일의 간섭을 거부했다. 그러나 중국이 수 많은 군벌로 찢어졌다는 현실은 회복할 수 없었고, [[쑨촨팡]]의 남부 직예군벌 세력인 팔성연합은 얼마 못 가 더 급진적으로 변한 [[왕징웨이]]가 이끄는 국민당 좌익의 잔존 세력과 안경군벌, 양광군벌, 호남군벌, 그리고 쑨촨팡의 골수파 세력인 난징군벌로 찢어지게 된다. 일본에게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연쇄적 붕괴는 행운이었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아니였다. 독일이 유럽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국가의 가장 강력한 강점들을 흡수한 독일의 대두로 인해 행운은 얼마 안 가 끝나고 만다. 독일은 대전쟁 당시 [[키아우초우]]를 공격한 일본을 똑똑히 기억했고, 유럽에서의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을 거부한다. 독일 제국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비롯해 남중국해 전반에 퍼진 식민지들을 모두 흡수했으며, 이러한 거대 식민지를 해군기지 삼아 일본 해군을 적극적으로 견제했고, 어지간한 강대국 못지 않은 거대 해군이 눈 앞에서 공격할 수 있단 실질적인 위협 앞에 일본 해군은 현실보다 더 작은 세력을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은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일본은 괴뢰국들을 만드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쿠데타 실패로 모스크바에서 도망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과 체코군단을 통해 만든 트란스아무르와 직봉전쟁 이후 도망친 장쭤린의 봉천 정부가 그 괴뢰국들이었으나 [[만주국]]과 달리 완벽한 괴뢰화는 이루지 못 하였다. 콜차크는 모스크바에서 그를 사면한다면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가버려 트란스아무르는 무너질 것이고, 봉천정부 내의 일본의 영향력은 불안정하다. 인도, 베트남을 비롯한 협상국의 구 식민지들 중 상당 수는 독립하거나 분열되었거나, 독일의 손아귀로 떨어졌다. 그러나 독일의 초보적이고 방만한 식민지 운영과 무리한 라이히스팍트의 유지는 독일에게도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서 결국 1936년 2월, 독일 주식 시장의 총체적 붕괴가 발생해버린다. 프랑스와 영국은 그저 이익관계의 갈등이 아니라 한 쪽이 죽어야만 끝날 최악의 적으로 변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해 땅들을 빼앗긴 러시아 공화국은 분노에 들끓는 국가가 되어 재무장을 행하는 한편, 생디칼리스트들과도 손잡아 독일을 무너트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미국의 경제는 영국 혁명으로 인한 연쇄적인 경제 파동으로 무너지게 되었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소아마비를 회복하지 못 하고 사망하여 현실과 달리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정치적 격변은 없었고, [[허버트 후버]]의 경제 정책 실패는 미국 내 급진주의자들을 자극시켰다. 러시아의 실패와 프랑스, 영국의 성공을 본 사회주의자 [[존 리드]]와 이러한 붉은 위협을 막기 위해서 준동하기 시작한 뉴올리언스 주지사 [[휴이 롱]]은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적극적으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대공황과 질서의 붕괴로 얼룩진 1936년의 새해가 도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